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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드리]

[마리드리]



잠에서 깨면 시곗바늘은 또 멀리 달아나 있다. 이번엔 몇 시간을 잃어버렸을까. 세 시간, 아니면 네 시간? 물론 열두 시간, 아니 만 하루를 허투루 보냈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눈을 뜨면 매일 같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재촉하는 일 따위를 해야 할 뿐이니까—물론 자신은 그 행위를 즐긴다. 총을 쏘면 엉망진창이던 속이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오드리가 이 기괴한 경험을 싫어하는 건 쓸데없는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 아니라, 잠에서 깬 뒤 몽롱한 상태에서 찾아오는 기억의 조각들 때문이었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먼 과거의 일, 양아버지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어찌할 새도 없이 끔찍한 기억에 잠식당하고 만다. 눈을 꼭 감고 귀를 틀어막아 듣지 않으려 애를 써도 욕망에 충실한 그 추잡한 숨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요, 언니.'



역겨운 음성을 가르고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약해 보이던 겉모습과 달리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곧잘 싸우던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쌀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느라 힘이 세졌다고 말하며 웃던 아이. 처음에는 못 미더운 남자 가이드들보다는 나을 것 같아 선택했던 아이인데, 이제는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눈을 뜨자 휘몰아쳐 오는 암흑의 구렁텅이. 저의 의지 따윈 상관없이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겨우 세이렌을 잡았다. 혹시나 하고 침대 헤드 옆 탁자에 세이렌을 놓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마리를 호출했다. 차가운 금속버튼의 느낌은 필요 이상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몸과 마음을 식혀주는 듯 했다. 아직 아이의 목소리를 듣기 전인데도 벌써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드리 씨?"



문가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식간에 경계 태세를 갖춘 오드리는 이 섬뜩한 목소리가 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기억의 일부인지 실제 상황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패닉 상태였다. 아직까지도 귓가에 웅웅거리는 남자의 소리 때문에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 걸 보면 분명 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오드리는 적어도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의 눈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정도는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사이코패스 여자가 모두를 죽이고 그 형사까지 죽이려다 총에 맞아 같이 죽는다. 얼마나 깔끔해.'



하얀 가운, 손에 들고 있는 플라스틱 차트, 단정한 옷매무새. 눈앞이 흐릿해져 얼굴은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예전에 느꼈던 공포가 고스란히 저의 몸을 덮쳐온다. 아니, 그때는 이런 공포심마저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때보다 더 숨통이 옥죄어지는 느낌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피에 젖어 헐떡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다. 그의 피곤해 보이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침대 밑으로 고꾸라졌다.



"…윽."
"저런, 오드리 씨. 아직 아파 보이네요. 약은 잘 먹고 있어요?"



모든 상황이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그때와 똑같았다. 하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저에게 다가온다. 가이드, 마리가 빨리 와줘야 하는데. 과거의 기억과 동반되는 끔찍한 두통에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세이렌을 부여잡은 오드리는 구두 굽으로 자신의 손을 콱 밟아버리는 괴한 때문에 다른 한 손으로 제 팔을 꽉 잡고 이를 악물었다. 꼴사납게 남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세이렌은 아까부터 마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는커녕 전파 방해가 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누군지 모를 이의 발에 좀 더 힘이 들어간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정말로 우드득 소리가 나며 엄청난 고통이 동반되었다. 전파 방해 어쩌구 하면서 떠들던 오퍼레이터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손과 함께 부서져 버린 거겠지. 깨져버린 세이렌의 파편이 손바닥을 아프게 찌른다. 생뼈가 부러지는 고통에 새어나오려는 신음을 꾹 참고 있다가, 몽롱하게 들려오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끝으로 애써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끄트머리를 놓아버렸다.



***



"마리 누나.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아, 톰. 무슨 일인데?"



형한테 발작이 왔다는데, 내가 지금 임무가 하나 잡혀 있어서……. 휴일인데도 나갈 채비를 하던 톰은 답지 않게 얌전하게 말을 꺼냈다. 대신 나가줄 테니 어서 가라고 등을 떠밀자 굳은 표정으로 고맙다고 인사하며 방을 나서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살짝 뒷걸음질쳐 들어와 마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오드리 누나는 괜찮대요? 저번에 보니까 꽤나 심한 것 같던데. …그, 마인드라는 여자 말이야.


마인드. 남의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유유히 사라지던 여자. 과거의 트라우마로 덜덜 떨고 있던 오드리를 안전한 곳에 두고 마인드의 뒤를 쫓아 덜미를 잡은 것까진 좋았는데,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저도 닥터 하이드로처럼 군단에 합류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자신을 포함한 가이드 몇 명은 며칠 간 오드리의 주위를 엄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같은 센티넬임에도 마인드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맥과 달리, 그 냉철하던 오드리는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 일 이후로 마인드라는 여자는 오드리에게 유난히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센티넬 보호구역에 있으면 오드리의 발작이 뜸해지는 것 같으니 마리 자신도 조금은 안심하고 다닐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임무가 끝나면 찾아가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괜찮을 거라 말하며 톰을 내보냈다.



"아, 마리 양. 혹시 마인드를 보지 못했나?"
"마인드요?



찾는 사람이 있다는 오퍼레이터의 말에 혹시 오드리일까 싶어 얼른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는데, 저를 찾는다던 그 사람은 닥터 하이드로였다. 그새 쇠약해진 그를 보고 최근에는 본 적이 없다 말하자 실례했다며 얼른 방을 떠나는 구부정한 박사의 뒷모습이 어딘가 수상해 보였다.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센티넬 보호구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드리 언니는 괜찮으려나.



"마리 언니!"



오늘은 왜 이렇게 여기저기서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건지. 자신의 이름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맹이가 서 있다. 자세히 보니 조금 불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라는 오드리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였는데. 불길한 생각이 피어오른다. 하이드로를 만났을 때부터 느껴지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것 같다. 차분히 숨을 고르고 무슨 일이냐며 상냥하게 물었다.



"…저, 아까 오드리 언니 방을 지나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마리는 오드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라를 뒤로 하고 센티넬 구역을 향해 달려갔다.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어쩐지 잠잠하다 싶더니만, 결국 이렇게 일이 터지고 말았다. 만약 지금 마인드가 오드리와 같이 있는 거라면, 닥터 하이드로가 마인드를 찾았던 이유까지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래, 또 오드리에게 접근했다 이거지. 마리는 긴장과 불안, 피곤으로 점철되어 덜덜 떨리는 두 다리를 재촉하며 세이렌을 두드렸다. '지금은 신호를 찾을 수 없어……' 반갑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만 반복해서 나온다. 오드리의 방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좀 더 가면 보이는 귀퉁이만 지나면……. 서두르다 보니 자꾸 걸음이 꼬였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몸을 일으키며 계속 뛰어 마침내 오드리의 방문 앞에 섰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조용한 만큼 아무 일도 없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역시, 당신."
"어머, 이게 웬 방해꾼이람."



감정 없이 내뱉는 감탄사. 낯선 차림의 마인드는 뭐가 그리 좋은지 눈까지 살짝 휘어 웃으며 저를 반긴다. 얄미운 얼굴을 노려보다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오드리가 한쪽 손을 밟힌 채 쓰러져 있었다. 제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걸 본 마인드가 슬쩍 발을 치운다. 무슨 짓을 한 거야? 희미한 미소를 띠고 오드리를 쳐다보던 그녀는 그 입가의 미소 그대로 비릿하게 저를 향해 웃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패닉 상태에서 찾아오는 경험적 기억의 편린을 상기시켜 그에 대한 피실험자의 반응을 살펴보는 연구 중이었는데, 문제라도?"
"연구? 웃기고 있네. 이건 그냥 괴롭히는 거잖아."
"괴롭힘이라니, 서운한걸."



마인드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은 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언뜻 본 이 여자의 과거가 꽤나 흥미진진해서 말이지. 더 알아보고 싶었어. 어때, 당신은. 궁금하지 않아? 최면을 거는 듯 부드럽게, 조용하게, 나긋나긋하게, 그러나 힘이 실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맞아, 사실은 궁금했어. 어쩌다 그 젊은 나이에 이혼녀가 되었고, 어쩌다 살인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던 건지. 어쩌다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쩌다, 그런 발작을 일으키게 된 건지. 센티넬로서 굉장한 전투능력과 민첩함을 가진 그녀의 가장 큰 결함은 감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전쟁터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결함이 아니라 축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터에서는, 독고다이 스타일로 일하는 사람에게도 동료가 필요할 터였다. 그녀는 감정이 없다는 점 때문에 곁에 마음을 나눌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 때문인지,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까지 쓸쓸해지는 기분이 들어, 더 그녀를 챙겨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이드라는 건 결국 명목이었을 뿐이야. 그래, 나는 그녀를…….

생각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듯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나쁜 두통이 뒤늦게 찾아온다. 잃어버린 현실감각 때문에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쿡쿡,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인드는 그런 저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아, 당했구나. 저도 몰랐던 무의식의 끄트머리까지 파헤쳐졌다. 저의 모든 걸 알고 있을 그녀 앞에 서 있는 게 발가벗은 것처럼 부끄러워, 마리는 괜히 화를 내며 마인드를 내쫓았다.



"…아무튼! 앞으로는 오드리 씨에게 그런 의도로 접근하지 마."
"그런 의도라니? 난 당신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건데. 애정을 듬뿍 담아서 말이야."
"…무슨 헛소리야?"
"연구원이 연구 대상에게 가지는 감정이 애정이 아니면 뭐겠어?"



당신이 이 여자에게 가지는 감정도, 애정이고 말이야. 안 그래? 아, 당신은 모르고 있었던 건가? 마인드는 특유의 힘이 풀린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제 아픈 곳을 찔러왔다. 자신의 감정도 눈치채지 못하는 선수라니. 선수 자격 박탈까진 아니었지만, 남 앞에 떳떳하게 말할 일 또한 아니었다. 우두커니 서서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마리를 보며 피식 웃은 마인드는, 조용한 방 안을 구두 굽 소리로 요란하게 울리며 마리를 지나쳐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치료부터 해요, 마리 씨. 마인드의 마지막 말에 정신을 차린 마리는 우선 오퍼레이터에게 치료 가능한 가이드를 보내달라고 연락을 넣은 후 오드리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몸을 굽혔다. 왼손 뼈가 완전히 박살 나 굵은 뼛조각이 피부 조직을 뚫고 나와 피가 흥건했다.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연락을 안 한 거야. 안쓰러운 마음에 듣지도 못할 오드리에게 괜히 툴툴거리다 손 아래에 깔린 세이렌 조각에 말을 멈췄다. 오드리는 뼈가 부러지기 전까지도 저에게 연락하려 했다. 센티넬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 가이드를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오드리가 자신을 믿어줬다는 생각에 새삼 눈물이 났다.

당신은 나를 믿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을 텐데, 나는 당신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했어. 미안해요, 정말. 그리고……. 다친 오드리의 왼손을 부여잡고 중얼거리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의 감정을 깨달았으니, 입 밖으로 꺼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듣지 못해도 좋았다. 아니, 듣지 못해서 좋았다. 비겁한 짓이겠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할 것 같았다. 마리는 앙다문 입술을 열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작은 목소리로, 제 마음 깊숙히 박혀 있던 말을 뱉어냈다. 미안해요, 정말. 그리고.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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