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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세실 드 뒤씨엘]

알비노. 보라색 눈동자. 마녀와 비슷한 이목구비. 그 세 가지는 그녀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깨끗함. 순수함? 아니, 글쎄. 적어도 그녀의 자존심에 때묻은 적이 없다는 건 맞는 말일지도.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핫이슈였다. 하얀 피부에, 보라색 눈동자. 알비노. 태양이 보내주신 순수한 아이.

문제는 그'녀'라는 것 뿐이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가문의 골칫덩이였다. 마스코트. 불의 원소가 우리 가문을 지켜주신다는, 대외적인 증표. 하지만 특별해야 할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먹고, 똑같이 행동했다. 아니, 똑같이 놀기만 했으면 다행이지. 그녀는 오히려 아이들을 선동하는 쪽이었다. 언제나 대장, 언제나 1등, 언제나 특별한 존재.

그런 그녀를 시기하는 패거리도 많았다. 없을 리가 없지. 모든 걸 다 가진 명문가의 독녀. 하지만 그들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순 없었다.

하루는 그녀가 다쳐서 들어왔다. 그녀의 패거리인 줄 알았던 여자아이들이 사실은 그녀를 싫어하는 패거리였다. 억울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어쩌다 그런 일인지 묻지 않았다.


"조심했어야지. 넌 항상 깨끗하고 순수해야 해."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아야 해.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고 똘똘해야 해.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고 똘똘하고 조신해야 해.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고 똘똘하고 조신하고 마나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해.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고……

젠장. 열다섯의 소녀는 처음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문에서는 점점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늘어만 갔다. 소녀는 자신의 가문이 싫었다. 하얀 피부도, 보라색 눈동자도, 알비노라는 점도 다 싫었다.

내가 하얗지 않으면 괜찮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넌 지금 이대로의 삶이 나아.

하지만 나는 하얀 게 싫은걸.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자, 나를 한 번 깨 봐.

쨍그랑 소리와 함께 경보음이 울렸다. 방에서도, 집에서도, 자신의 속에서도. 빨간 불빛이 눈 앞에서 흔들린다. 내가 빨갛게 바뀐건가? 아니, 아니야. 아직 하얗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거, 네 손에 들고 있는 거.

유리 조각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 이상하네. 유리는 말을 못한다고 했어.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넌 너희 엄마가 하는 말 다 들어? 아니. 그걸 어떻게 다 들어. 그럼 이것도 들을 필요 없어. 정말? 정말일까?

경보음은 계속해서 울린다. 높은 음, 낮은 음.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 음에 맞춰 자신의 몸도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깨진 거울 사이로 자신의 하얀 얼굴이 보였다. 손에 들린 작은 유리조각도 보였다.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그어.

시끄러워. 대체 누가 말하는 거야? 조용히 해. 시끄러워. 시끄럽다구. 제발, 조용히 좀 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힘이 빠졌다. 아. 그제서야 자신을 괴롭히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아. 발에 뭔가가 떨어진다. 뚝, 뚝. 빨간색 물? 아, 피.

벌컥. 문이 열린다. 엄마가 들어온다. 아빠도 들어온다. 유모도, 집사도, 가정교사도. 아아, 이렇게 가문의 주목을 받아본 게 얼마만인지. 당황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소녀는 몸을 뒤로 눕혔다. 몸이 일자로 기울어진다.

안 돼! 엄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진다. 자신의 귓가에도 울려퍼진다. 안 돼? 또 뭐가 안 돼? 난 안 되는 게 왜 그렇게 많아?

몰라, 나도 이젠.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 알 게 뭐야. 까딱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아니, 차라리 죽었으면. 어쭙잖게 살아서 얼굴만 허연 병신으로 살기보단, 죽는 게 낫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털썩. 소녀의 몸이 쓰러졌다. 동시에 조그마한 유리 조각들이 소녀의 등을 찔렀다. 소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파. 왜 빨리 죽지 않는 거야? 빨리 죽어서, 이 고통을 좀 없애줬으면.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들이 아득해져 갔다. 아, 이게 죽는다는 거구나.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보였다. 하얀 벽도 보였다. 하얀 침대도 보였다. 고개를 숙였다. 하얀 옷이 보인다. 손을 들었다. 하얗다. 뭐지. 천국은 원래 이렇게 다 하얀색 투성이야?

깨어났어요! 라는 소리가 들리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온다. 눈 앞이 희미하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뜬 사람처럼. 잠깐, 그럼 혹시?

손을 들었다.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들었다. 얼굴 위로 올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바로 내렸다. 짝, 소리가 나고 이마가 아팠다. 아팠다. 아, 아팠다.

엄마 얼굴이 보였다. 보기 싫은 엄마 얼굴이. 다신 안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엄마 얼굴이. 짜증나서 울었다. 그 옛날, 같이 놀던 아이들에게 배신당하고 다쳐 들어왔던 그 날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멍청한 사람. 내가 무서워하는 걸로 보여? 그래, 무서워. 당신들의 그 무서운 완벽주의에 이골이 나버렸어.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소녀는 엄마와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살면서 겪었던 모든 울분을 토해내려는 듯.

소녀는 퇴원했다. 더 있으라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나왔다. 소녀가 얻은 것은 그렇게나 꿈꿨던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상처들이었다.

그 날 이후로 소녀의 성격은 변했다. 말수도 적어지고, 행동도 크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고 똘똘하고 조신하고 마나를 잘 다룰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가문의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귀족들의 파티에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머리카락, 하얀 피부, 보라색 눈동자. 그녀가 파티의 톱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점점 파티에 초대되는 횟수가 늘었다. 그녀는 항상 등을 다 덮는 흰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그녀는 등이 파인 옷을 입지 못했다.

이제 파티에 나가는 것도 질릴 때쯤, 편지 한 통이 왔다. 보낸 이는 적혀 있지 않았다. 봉투에는 "Shargon" 이라는 짤막한 단어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엄마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샤르곤, 이거 학교 이름 아니니? 엄마의 목소리가 기쁜 듯 높게 올라갔다. 그래, 이런 학교에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지. 우리 딸은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고 똘똘하고 조신한데다가 마나까지 잘 다루는 아이니까.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녀는 곧바로 짐을 쌌다. 사실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열여섯, 일 년 전 그 날의 방황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학교에서 그녀는 더 이상 깨끗하고 순수하고 다치지 않고 똘똘하고 조신하고 마나를 잘 다룰 줄 아는 아이로 살지 않아도 되었다. 학교에 갈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블베치케]

[블베치케]



"치즈~ 오늘 재밌었어! 내일도 불러줄 거지?"
"으응, 물론이지."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그럼 내일 봐!"



근데 쟤는 저렇게 돈을 막 쓰고 다녀도 되는 거야? 난들 아니. 집에 돈이 썩어나나 보지. 암튼 우리는 그냥 대충 어울려주다가 돈이나 주워서 오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아? 하긴, 그건 그래……. 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의 높은 목소리가 치즈케이크의 귀에 틀어박힌다. 잘 가라고 손을 흔들고 있는 제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숨길 생각이 없는지 지들끼리 크게도 지껄인다. 계속 그렇게 힐끔거리던 아이 하나가 치즈케이크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손을 흔들고는 바로 뒤를 돈다. 새삼스럽게 인사는 왜 해? 불쌍하잖아. 지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병신같이 손 흔드는 게. 그 말에 허공에서 흔들리던 손이 멈췄다. 저들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다간 뭔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아 치즈케이크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파티의 흔적을 치우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 보고 병신이래. 내가 지들 일부러 끌어들인 건지도 모르고. 홧김에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치우다가 산처럼 쌓여 있던 접시들을 건드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위에 있던 티팟이 떨어지고, 하얀 식탁보가 불그죽죽하게 물들어 간다.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홍차를 닦아내려 황급히 마른 수건을 집어 든 손등 위로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진다. 비라도 오나 보네, 태연하게 중얼거렸지만 그것이 빗방울이 아니라는 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크림 가문의 몰락. 평생 일이란 걸 모르고 사셨다는 아버지는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드셨다. 다섯 개의 상자 중 하나에 들어가서 그걸 고른 사람 앞에 짠, 하고 나타나는 알바까지 얻으셨다니 말 다한 거지. 그래도 아버지께선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니신 덕에 일이 끝나고 오실 때마다 하루 일당 외에도 13% 정도의 보너스를 더 받아 오신다. 크림 가문은 당신이 재건하겠다며 부지런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조금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아버지에 비하면 딸인 치즈케이크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나 봐? 철이 안 든 건지, 그놈의 코인 폭죽인가 뭔가를 요즘에도 맨날 쏘고 다니는 것 같더라구. 어휴, 아버지만 불쌍하지. 등골이 휘어날 텐데.

이게 요즘 쿠키성 주민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재벌가였던 크림 가문이 몰락한 사건은 수다스러운 아줌마들이 입방아를 찧어대기에 충분했고, '그 집 딸은 아직도 망나니처럼 지낸다더라', 하는 씹기 좋은 이슈 역시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치즈케이크는 매일 파티를 열었다. 순수한 의도로 친해졌던 친구들마저 돈의 맛을 본 뒤로는 태도가 달라졌다. 심지어는 아예 돈을 목적으로 저에게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과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말을 섞는 일은 속을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역겨웠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도 제가 뿌린 씨앗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씨를 뿌리는 일을 멈추고 싶은 것도 아니다. 매일 여행을 다니시던 부모님 때문에 넓디넓은 저택에 혼자 남아 느꼈던 뼈가 시린 외로움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혼자 남는 것은 싫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람 냄새를 느끼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더러운 냄새라 할지라도, 아무 냄새 안 나는 곳보단 나았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자신이 아무 짓도 안 하고 돈만 쓰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파티장 한가운데서 잔고를 확인하던 치즈케이크는 탁자 위에 놓인 나침반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나침반 바늘이 움직인 날이다. 세 번? 아니, 두 번만 바삐 왔다갔다하면 지난 사흘간 써댔던 만 코인은 만회하고도 남을 것이다. 부모님께 짐을 지워드리지 않으면서 욕망을 채우려면 제가 직접 뛰어야 한다. 망나니라고 소문 난 크림 가문의 치즈케이크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치즈케이크는 씁쓸하게 웃고는 오늘 밤을 위해 짐을 챙겼다.







"여긴 올 때마다 으스스해……."



어두컴컴한 동굴과 그 어둠 속에서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정체 모를 존재,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하얀 뼛조각들은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러질 않는다. 코인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한 손에 꼭 잡고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바위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자 금화 하나가 딸려 나온다. 좋아, 이걸로 칠천 코인 째.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대금화 몇 개와 —이 섬의 주인이었던 사람은 이상한 취미를 가졌던 게 분명하다. 돈을 천장에 매달아 놓을 건 뭐람.— 바닥에 널려 있는 은화들을 주워가면 얼추 구멍은 메울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가보지 않은 저 작은 굴 안에 들어가면 금화가 더 있을지도 몰라. 치즈케이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발을 옮겼다.

작은 굴 아니랄까 봐 깊숙이 들어갈수록 천장이 낮아진다. 슬슬 제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낮아진 천장과 울퉁불퉁한 돌길에 발을 헛디딜 것 같아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때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제 바로 뒤에 뭔가가 떨어졌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는 건 비단 동굴 입구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치즈케이크는 불안한 마음에 슬쩍 뒤를 돌아봤다.



"꺄아악!"



썩어 문드러진 눈구멍 사이로 구더기가 기어 다니고, 빈 구멍으로는 썩은 물이 고여 찰랑거리는 소리가 제 비명소리와 섞여 메아리처럼 동굴 안을 울린다. 해골을 보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에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한 발, 두 발, 세 발째 뒤로 물러서다 툭 튀어나온 바위 하나에 신발 굽이 끼어 몸이 뒤로 젖혀졌다. 재빨리 몸을 지탱하려 손을 뒤로 뻗었는데 닿는 게 없다. 어, 어, 하는 사이 몸이 거꾸로 뒤집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구멍으로 떨어진다. 뭐라도 잡으려고 팔을 휘저었지만 잡을 거라곤 저와 함께 떨어지는 돌조각 몇 개뿐이다. 죽음을 직감한 걸까, 주마등처럼 옛날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친구들과 모여서 코인 폭죽을 터뜨렸던 날, 친구들과 모여서 코인 폭죽을 터뜨렸던 날, 친구들과 모여서 코인 폭죽을 터뜨렸던 날……. 순간 저의 묘비명이 될지도 모를 문구가 머리를 스쳤다.



『돈을 흥청망청 쓰던 크림 가문의 장녀 치즈케이크, 가문이 몰락한 후에도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더 쓰겠답시고 코인섬에 갔다가 발을 헛디딘 바람에 구멍에 빠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다.』



안돼. 이건 너무 한심한 묘비명이다. 나중에 내 후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 이렇게 어이없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무도 없을 동굴 입구에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살려줘어어어어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이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혔다. 아, 죽는 건가. 생각했던 것만큼 아프진 않네. 은근 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시신은 예쁘게 추려주길 바라며 정신이 있을 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았다.

……. 음, 뭔가 이상하다. 왜 내가 아직도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원래 죽기까진 오래 걸리는 건가. …누, 눈이라도 떠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치즈케이크는 실눈을 뜨고 위를 쳐다봤다. 뭔가 허여멀건 한 게 보인다. 아, 유령인 것 같다. 날 데리러 온 저승사자구나. 아아, 이제 진짜 죽는 거네. 아버지, 불효녀는 먼저 갑니다. 부디 너무 슬퍼 마시고 만수무강하시길……까지 생각했을 때, 촤악 하고 얼굴에 물이 뿌려졌다. 저승사자의 의식 같은 건가 싶어 가만히 있자 이번엔 누군가의 손이 제 뺨을 옴팡지게 때린다. ㅁ, 뭐야. 아파! 왜 죽었는데도 아픈 거지? 눈 떠도 되나……?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던 치즈케이크는 이번엔 주먹으로 어깨를 퍽퍽 때려대는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뭐, 뭔가요 대체! 아파요! 그만해!"
"아."
"…어?"



몸을 반쯤 일으킨 채 횡설수설 나불거리다 눈에 들어온 것은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의 블랙베리였다. 방금 제 어깨를 때린 사람이 이 아이였는지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보인다. 위치로 보아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으면 얼굴에 주먹을 날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정말 큰일 날 뻔했지. 치즈케이크는 머쓱하게 웃고는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 저기. 고마워. 아뇨, 별말씀을. 제가 거기 있었던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블랙베리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그럼 난 아직 안 죽은 거야? 그럼 저도 죽은 거겠습니까. 아니, 뭐랄까 블랙베리는 저승이랑 이승을 왔다갔다 한데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터무니없는 치즈케이크의 말이 웃겼는지 피식, 하고 바람 빠지듯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아래로 휘면서 잠시 그 철벽같던 무표정이 깨지더니 금세 뻣뻣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잠깐이나마 드러난 블랙베리의 맨얼굴이 의외스러워 멍하니 감상하던 치즈케이크는 블랙베리의 뒤에서 희여멀건 봉지 같은 게 떠다니는 걸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가 날 구해준 거구나. 고마워. 블랙베리의 뒤에 숨어 이쪽을 쳐다보던 집사 유령에게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듯 손을 건네자 블랙베리도 그 뒤의 유령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본다.



"안 무서워요?"
"귀여운데? 넌 혼자 있어도 심심하진 않겠다. 나도 유령 친구 하나 갖고 싶은데."



예상외의 반응이었는지 멍하니 저를 쳐다보는 블랙베리의 모습에 살짝 웃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동굴의 입구까지 데리고 나온 건지 아까보단 훨씬 넓고 환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 지금 제 옆에 있는 이 아이 덕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을 건넸다.



"그보다 너는 왜 그 구멍에 들어가 있던 거야? 물론 네가 거기 없었다면 난 이미 죽었겠지만."
"혹시 이쪽에 도련님이 계실까 싶어서……."
"아, 그 사고뭉치 도련님."



유적을 찾는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부잣집 도련님과는 어렸을 때부터 가문끼리 만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쪽 집안도 마찬가지로 돈이 썩어나게 많았기 때문에 제 코인 폭죽에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아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블랙베리와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는데, 크림 가문 사교 파티에 도련님을 따라와 신기하다는 듯 제 코인 폭죽을 빤히 쳐다보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옛 추억을 되살리며 아련한 기분에 잠겨 있는데, 마주 앉아 있는 아이가 산통을 깨는 말을 던졌다.



"그러는 치즈케이크 님은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어?"
"딱히 오실 일이 없지 않습니까? 돈을 벌러 오신 것도 아닐 테ㄱ……아."
"뭐야, 그 표정은. 별로 맘에 안 드네. 동정하지 마."
"아, 죄, 죄송합니다."



아픈 곳을 건드린 게 죄송하다는 건지,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게 죄송하다는 건지. 어느 쪽이든 그닥 맘에 드는 대답은 아닐 것 같아 그냥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 파티장에서 들었던 말들이 떠올라 뭔가가 울컥하고 터져 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을 정도로 가시 돋친 말들이 머리를 거치지도 않고 목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모처럼 만났는데 폭죽도 못 보여주고 미안하네. 보다시피 내가 지금 거지꼴이라서."
"……."
"내가 왜 이런 데까지 와서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는지 알아?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 파티를 안 열면 곁에 사람이 없으니까."
"……."
"집안이 쓰러져가는데 내 걱정만 하고 있는 거 보니까 우습지?"
"하나도 안 우습습니다."
"난 우스워. 마을로 돌아가면 사람들한테 소문이나 내는 건 어때? '치즈케이크가 파티 열 돈을 벌려고 코인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인기 좋을걸, 이런 얘기."



아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는데, 괜히 억울한 데 분풀이를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악에 받쳐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놓고 나니 아이를 보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지금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와 버릴 것 같아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발을 옮겼다. 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이제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지금 후회해봐야 소용없을 거였지만. 우울한 기분으로 동굴의 입구에 다다를 때쯤 블랙베리가 뒤에서 제 손을 탁 잡아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휘청거릴 뻔한 몸을 겨우 지탱하고 뒤돌아 아이를 봤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다 잔뜩 화가 난 듯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덜컥 겁을 먹어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더 험악한 무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 화를 낼 만도 하지. 죄책감에 눈도 못 마주치고 살짝 고개를 돌리자 아이는 한숨을 한 번 푹 쉬더니 말을 꺼냈다.



"그런 소문을 내서 제가 얻을 수 있는 게 뭡니까?"
"…그, 글쎄."
"그럼 제가 잃을 수 있는 건 뭔가요?"
"그, 그것도 모르겠는데……."
"치즈케이크 님을 잃겠죠."
"……."
"전 잃을 게 더 큰 짓은 안 하는 사람이라서요."
"……."
"바래다 드릴 테니 같이 가시죠.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멍하니 서 있는 제 팔을 잡아끌고는 성큼성큼 걸어간다. 역시나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보고 걷는다. 괜한 분풀이를 듣고 화가 나 가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저를 잡아 준 아이가 새삼 고마웠다. 메이드들은 사람을 배려하는 방법도 배우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사과해야 할 것 같아 제 손목을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살짝 빼내 깍지 껴 잡았다. 앞서 가던 몸이 조금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저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기라도 했는지 운을 떼는 목소리가 먹먹하다. 앞만 보고 있던 얼굴이 저와 마주한다.



"미안하고……고마워."



서툰 사과에 아이가 활짝 웃는다. 아까처럼 살짝 미소 짓는 게 아닌, 정말 기분 좋다는 듯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밝아, 치즈케이크는 그 옛날 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블랙베리처럼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딧불이가 우는 밤 / 1차 창작 / 커플링 요소 X]

매일 반복되는 그저 그런 하루가 또 끝나고, 이제는 좁다 불평하기도 지겨운 방, 그 방 한 켠에 놓인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에 오늘도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피로감이 몰려온다.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다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내 이마를 톡톡 치는 느낌에 슬쩍 눈을 떴다. 당연히 내 방의 칙칙한 회색 천장이 보일 거라 생각했던 눈을 뜨자 보이는 웬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에 놀라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베이지색 민무늬 원피스와 빨간 구두 차림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작은 보라색 양산을 들고 여전히 그곳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게 정체 모를 위화감을 불러온다. 나는 갑작스러운 낯선 이의 존재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현관문도 잠갔고, 창문도 닫았고, 우리 집은 아파트 5층이다. 외부인, 그것도 이런 어린아이의 침입은 절대로 불가능한 조건. 귀신이 아니면 꿈일 거라 치부한 나는 아이의 정체를 캐묻는 대신 주위를 살폈다. 제가 잠든 곳은 회색 천장과 하얀 바탕의 플라워 프린팅 벽지가 은근하게 어우러진 좁은 방의 침대 위였는데,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곳은 허허벌판—허허벌판이란 말이 이런 데에 쓰이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이라서, 이건 꿈이구나, 하고 나직이 읊조렸다. 그 혼잣말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랍다는 듯 말했다.



「언니는 되게 차분하네? 다른 사람들은 자각몽인지 뭔지라고 신나서 난리치던데.」
「꿈이라는 걸 아는 것뿐인데 굳이 신날 이유가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아이는 대 자로 뻗은 내 옆에 쪼그려 앉는다. 그러고는 계속 나를 쳐다본다. 끈질긴 아이의 시선에 몸을 일으키려다 움찔하고 다시 누워버렸다. 꿈인데도 몸 여기저기가 쑤신다. 저 멀리 점처럼 작게 보여야 할 곳도 없이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한 공간, 누워 있으면서도 내가 누워 있는 건지 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경계가 나뉘지 않은 무(無)의 공간. 무중력 상태가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허하지만, 그 덕에 이 공간 자체가 나를 품고 있는 것 같아 포근한 곳. 이런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온몸에 느껴지는 고된 하루의 아우성들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아이러니하다. 꿈에서도 느낄 만큼 피곤했나 보지.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리를 하고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던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이 이공간의 창조자인 것 같은 아이는,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어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쳐다 봐?」
「언니는 바라는 게 없잖아.」
「꼭 있어야 돼?」
「그래서 오히려 더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대답을 하는 건지, 자기 할 말만 하는 건지. 어린 아이답지 않게, 아니 어쩌면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졌을 대화를 마치고 아이는 또 나와 눈을 맞춘다. 그 끈질긴 시선이 어서 대답을 해달라고 종용하는 것 같다. 알았어. 말할게, 소원. 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무슨 소원을 빌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이 먼저 열렸다. 아니, 사실 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꼭 체한 것처럼 목구멍에 얹혀 있던 말이었다.



「반딧불이가 보고 싶어.」
「반딧불이? 그걸로 되는 거야? 언니는 진짜 이상하네. 낭만을 좇는 어른이라는 건가?」
「여기서 불린 돈이 나가서도 그대로 있을 거라는 게 확실하면 내 계좌 잔고를 스무 배쯤 늘려주던가.」
「안된다는 거 알고 하는 소리지? 이렇게 보면 참 현실적인데.」



뭐 아무튼, 알았어. 조용히 말하더니 들고 있던 양산을 요술봉처럼 흔든다. 저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인데, 말할 땐 귀여운 구석이라곤 없어 보인다. 양산을 들고 글씨 쓰듯 휘두르는 아이의 모습에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쳐진다. 나도 어렸을 때 긴 막대기만 보이면 잡고 휘두르며 사랑과 정의를 외쳤더랬다. 다시 처음 느꼈던 위화감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소름이 돋는 것처럼 기분 나빠 살짝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이는 몇 번 더 조그만 양산으로 허공을 휘젓고 다니더니 마침표를 찍듯 제 발 옆을 쿡 찔렀다. 그러자 온통 하얗던 공간이 어두컴컴한 밤하늘로 바뀌었다. 초승달이 저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어두운 하늘 아래, 어느새 내가 누워 있던 바닥은 푸른 잔디밭이 된다. 별 하나 없는 인공적인 밤하늘이었지만 그래도 하늘은 하늘이었다. 놀라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몸을 살짝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듯 쿡쿡 쑤시던 근육통은 잊은 지 오래다. 입을 떡 벌리고 아이를 쳐다보자 아이는 제 나이 또래답게 해맑게 웃어 보이고는 내 옆에 와 앉는다.



「아직 놀라긴 일러요.」



아이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희미한 불빛 하나가 내 바로 옆에서 하늘로 천천히 올라간다. 처음 보는 그 신비로운 몸짓에 취해 손을 뻗어 봤지만 닿지 않았다.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가버린 반딧불이 한 마리는 초승달을 따라가는 듯싶다가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좌우로 몸을 천천히 흔들기만 한다. 그게 신호였는지, 우리와 함께 잔디밭에 앉아 있었을 반딧불이 몇 마리가 더 날아오른다. 그 뒤를 이어 또 몇 마리, 선두의 꽁무니를 쫓아 다시 몇 마리, 장난치듯 가볍게 원을 그리며 몇 마리 더. 그런 식으로 날아오른 반딧불들은 어느새 수십 개가 되어 별처럼 밤하늘을 채운다. 올라갈 것 같다가도 다시 내려오고,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다니다 몇 마리가 뭉치고 흩어지고. 인위적인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로운 움직임에 홀린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별이 없어 위화감이 느껴지던 하늘은 이제 반딧불이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으로 반짝거린다. 그네들이 별처럼 하늘을 수놓는다. 하지만 단조롭지 않게 살짝살짝 움직이며, 마치 별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별빛이 내려오는 것처럼, 그 옛날 동화책에 나오던 꼬마 요정이 마법 가루를 뿌린 것처럼 끊임없이 빛을 흘린다. 노란, 아니 하얀, 아니,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불빛들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황홀함에 젖어 밤하늘을 쳐다보는 내 옆에서 아이는,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왜 반딧불이가 보고 싶었던 거야?」
「어렸을 때 꿈이었거든. 반딧불이가 우는 밤.」
「…어렸을 때 꿈?」
「어렸을 때, 글쎄, 너만 할 때였나? 동화책에서 본 삽화가 너무 예뻤어. 아직도 기억나. 어둡고 좁다란 시골 길을 반딧불로 비추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이는 내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아무 말 없이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이의 어깨에 앉은 반딧불이를 다시 하늘로 올려보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꿈이었어. 반딧불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는 게. 꿈에서지만 꿈을 이뤘네. 고마워.」
「으응, 별말씀을. 아직도 기억해주고 있다니, 내가 더 고마워.」
「…무슨 말이야?」



영문 모를 마지막 말에 멀뚱히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자 아이는 알쏭달쏭한 미소를 짓고는 양산을 들고 일어섰다. 밤하늘을 장식하던 반딧불이들이 하나둘 잔디밭에 내려앉기 시작한다. 마치 느리게 떨어지는 별똥별 같다. 잔디밭이 반딧불로 반짝거리자 별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조그맣던 빛들이 한데 모이니 너무나도 밝아서, 살짝 눈을 찌푸리고 무어라 말하고 있는 아이를 쳐다봤다.



「자,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벌써 끝인 거야?」
「아니, 끝이 아니라 시작이지. 언니가 있어야 할 곳으로의 시작.」
「그건 너무 잔인한 소린데.」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잔디밭의 반딧불들은 해사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비춘다. 잘 가, 언니. 나중에 또 볼 수 있길 바라. 그 말에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부터 느껴지던 낯익은 위화감이 절정에 달해 가슴께에 무겁게 얹힌다. 재채기가 나오려다 만 것처럼, 뭔가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간질간질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이는 말을 마치자 점점 희미해지더니, 잔디밭에 내려앉았던 반딧불이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름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이의 소멸과 함께 부서지는 하얀 꿈의 조각들에 파묻힌 나는, 아이의 마지막 말에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찝찝함의 구렁텅이에서 한참을 허우적댔다.





번쩍 눈이 뜨이고 익숙한 회색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조각들이 눈가를 간지럽힌다. 부서지는 햇빛 비슷한 걸 어디에서 본 듯한 기분이 든다. 눈이 부셔 창문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구석에 세워 둔 보라색 우산이 시선을 끈다. 우산? 이상하네. 양산이 아니라? …뭐가? 뭐가 양산이 아니란 거지? 제멋대로 흘러가던 의식이 어딘가에 턱, 하고 막힌다. 왜인지 모를 익숙한 위화감이 가슴을 쿡쿡 찔러온다. 그 기분 나쁜 느낌을 떨쳐내려 얼른 돌려버린 시선은 화장대 위에 놓인 낡은 액자로 던져졌다.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제 막 도망치려는 환상의 끄트머리를 낚아챘다.



『내가 더 고마워.』



와르르.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던 벽이 무너져 내린다. 내내 뿌옇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만족스러운 해소감이 찾아온다. 이제야 찾은 그리운 느낌.

꿈에서 만난 그 아이는, 먼지가 켭켭이 쌓인 오래된 기억 한 켠에 오롯이 남아 있던 어린 나의 모습이었다.




***


글에 어울리는 이미지가 있어 첨부합니다. :)




[에리우미] If - 뱀파이어 에리

[에리우미] 뱀파이어



※ 장르는 뱀파이어 러브 코미디라고 우겨봅니다(...)
※ 분량 조절 실패. 꽤 길기 때문에 스크롤의 압박을 주의해주세요.
※ 캐붕 및 내멋대로 세계관 주의.



학교라는 공동체 생활에서 비밀을 지키는 건 힘든 일이다.




"에리, 왜 안 드세요?"



그것도 '생존'에 관한 비밀이라면 더더욱.



"배, 배가 별로 안 고파서. 도시락도 없고, 하하……."
"안돼요. 식사는 조금씩이라도 꼬박꼬박 챙기셔야 해요."
"으응……."



그렇게 말하며 제 도시락의 밥을 한 숟가락 큼지막하게 퍼 내민다. 슬슬 피해봤지만 우미는 이쪽이 받아먹을 때까지 쭉 그러고 있을 기세였다. 아, 하세요. 단호하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멋쩍게 하하 웃기만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숟가락을 받았다. 밥을 입에 욱여넣고 꼭꼭 씹자 우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생긋 웃어주고는 다시 코토리와 즐겁게 이야기하며 도시락을 먹는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입 안에서 서걱거린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지. 당장이라도 뱉고 싶은 불쾌한 느낌이었지만, 그랬다간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고. 결국 몇 번 안 씹고 덩어리채 꿀꺽 삼키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깔깔하다. 오랜만에 딱딱한 걸 씹어서일까, 한쪽 어금니가 얼얼하다. 아, 이상한 걸 삼켜 버렸으니 오늘은 속이 안 좋을 게 뻔했다. 아니나다를까, 낯선 음식물의 침입에 위장이 들썩거린다.



"우욱……."
"에, 에리?! 괜찮으세요?"
"으응, 그냥 속이……좀……."
"아, 전 그런 줄도 모르고……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괜찮아지겠지."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믿을 리가. 우미는 속이 안 좋은 사람한테 억지로 뭔가를 먹였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밥을 먹으면서도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 저 아이까지 체하겠다 싶어 정말 괜찮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이 안좋은 건 둘째치고, 아까부터 계속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머리가 아팠다. 멤버들에겐 맛있는 냄새겠지만, 나한테는 아니니까. 게다가 소화 못 시키는 것도 꼴에 음식이라고, 한 번 뭔가가 들어오니 배가 고파 못 견딜 지경이었다. 나도 애들 올라오기 전에 점심이나 먹어볼까.

그래, 이쯤 되면 다들 눈치챘겠지만, 사실 나는—



"그럼 나는, 저……올라가봐도 될까? 음식 냄새 때문에 속이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뱀파이어다.



뱀파이어라고 하면 흔히들 십자가나 은을 무서워하고, 햇빛에 약하며, 미모의 여인만을 노려 긴 송곳니로 피를 빨아 죽이는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는데, 그건 다 옛날 이야기일 뿐. 극소수만 남아 있는 현대의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약점 때문에 '생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자 최소한의 특징을 제외하곤 일반 사람들과 똑같게 진화했고, 그 덕에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저만 해도 지금처럼 벌건 대낮에 아무런 고통 없이—오히려 스쿨 아이돌로서 활발한 활동까지 하면서—다닐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자유로운 활동에는 제약이 따르는 법. 뱀파이어들은 일반인들과 달리 지켜야 하는 그들만의 규칙이 따로 존재한다.



그 첫번째.



"에리, 속이 많이 안 좋아요? 그……소화제라도 드실래요?"
"아냐, 괜찮아. 걱정 끼쳐서 미안. …먼저 들어가볼게."



인간의 약은 복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외형적으로는 분간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종족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들의 약은 오히려 몸에서 이상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사실 뱀파이어라는 종족 자체가 재생력이 뛰어난 편이어서, 약 같은 걸 먹을 일이 없기는 하다. 그러니까 이 말은 결국, 인간들이 주는 걸 아무거나 받아먹지 말라는 뜻. 그리고 지금 내 몸뚱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그건 인간들의 음식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 같다.



그 두번째.



"분명 챙겼던 것 같은데……아, 찾았다."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는 일은 최대한 피한다.

애초에 뱀파이어가 인간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던 것도 우리가 그들의 피를 주식으로 섭취하기 때문이었고, 지금 우리가 아무 문제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이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냐고? 인간의 피 대신 소나 돼지의 피를 먹는 동족들도 있지만, 역시 영양 면에선 인간의 피가 최고이기 때문에 우리는 '헌혈'이라는 아주 좋은 시스템을 이용한다. 내 손에 들린 이 혈액팩 하나면 사흘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우리는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아도 되니까 좋고, 인간들은 정기적으로 피를 공급하는 대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좋고. 그런 걸 생각하면 적십자사는 종족 대평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세번째.



"에리쨩, 그거 뭐야?"
"어?! …아, 이거? 토마토 주스……?"
"와, 나도 한 입만 줘!"
"아, 안돼! 아우, 이거 맛이 이상하네. 상했나 봐! 버려야겠어."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

요즘엔 개방적인 사람들이 많은 데다가, 우리가 딱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뱀파이어라고 밝혀도 무서워하거나 도망치는 반응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간혹 자신들의 피를 마신다는 것 자체를 꺼리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 결국은 뱀파이어들의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서 꼭 지켜야 할 조항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외에도 한 달에 정해진 혈액팩 보급량을 넘기지 말라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노약자 및 임산부의 피는 빨면 안된다던가 하는 자질구레한 조항들도 있다. 사담이지만, 내가 듣고 제일 웃었던 건 '사랑하는 사람의 피는 빨지 않는 것이 좋다.' 라는 조항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빨지 말라기보단 빨아도 소용없다는 맥락이었던 것 같다. 사랑을 하면 나오는 호르몬이 속을 더부룩하게 한다나. 처음 마실 땐 그대로인데 두 번째부터 그 사람의 피 맛이 물처럼 밍밍하게 느껴진다고 했던 것 같다. 한 번까진 괜찮다 치지만, 두 번 이상 물리면 아무리 건강한 인간이라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한 일종의 보호책이라던데, 사랑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어야지.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지금은 뱀파이어라고 옛날처럼 숨어 살지는 않아도 된다는 거다.



"아무튼, 멤버들 밥 다 먹었으니까 얼른 올라와! 아, 우미 쨩이 몸이 너무 안 좋으면 오늘은 그냥 쉬래!"



…물론 지금처럼 갑자기 누가 쳐들어올 때는 숨겨야 겠지만. 난 아직 못 먹었는데……. 갑자기 쳐들어온 호노카 때문에 깜짝 놀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점심을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게 이번 달 마지막 식사였는데. 오늘로 벌써 닷새 째 아무것도 못 먹은지라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사흘은 어떻게든 빈 속으로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내일만 학교에 나오면 모레는 주말이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겠다는 슬픈 생각을 하다 옥상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화도 잘 못 시키는 음식을 억지로 삼킨 탓에 더부룩한 속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밥 좀 달라 아우성치는 제 몸뚱이를 달래고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으앗-!"



쿠당. 오늘따라 스텝이 꼬인다 싶더니, 결국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제대로 엉덩방아를 찧어버린 바람에 눈물이 핑 돈다. 깜짝 놀라 순식간에 제 주위를 둘러싸고 걱정의 눈빛을 보내는 멤버들에게 이 정도는 끄떡없다며 벌떡 일어났다가 갑자기 드는 현기증에 또 다시 픽. 평소 같았으면 정말 괜찮았을 텐데, 요 며칠 굶은 게 문제였다. 몇 번 더 일어나려고 끙끙거리다가 그냥 맨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하늘도 노랗게 보이는 것 같고……. 도저히 혼자서는 못 일어날 것 같아 가까이 있던 우미에게 일으켜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우미는 걱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얼른 손을 잡고 일으켜줬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아이여서일까, 팔힘을 이용해 쑥 일으키는 바람에 순식간에 들어올려진 내 몸이 우미의 몸과 살짝 부딪혔다.



"에, 에리.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오늘은 좀 쉬시지……."



아, 실수였다. 혼자 일어나는 거였는데, 왜 일으켜달라고 부탁을 해서는. 우미와 닿자마자 코끝을 훅 찌르고 들어오는 달큰한 피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져 휘청거렸는데, 그걸 또 아이가 잡아버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땀을 흘리고 나서인지 한층 더 강해진 아이의 체향에 섞인 먹음직스러운 혈향이 식욕이라는 본능을 부추기고 있었다. 허기가 더 심해졌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버틸 수 없을 지경이어서 아이에게 더 기대어 있고 싶었지만, 이 이상으로 가까이 하면 정말 사고를 칠 것 같아 우미의 손을 뿌리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제 도움을 내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아이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상처받은 건가, 아니면 화가 났나. 조금 굳은 표정의 우미는 옆에 있던 노조미에게 무어라 속삭이고는 내 몸을 벌떡 일으켜 부축하듯 팔을 뻗었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탓에 낑낑거리나 싶더니 얼추 비슷하게 자세를 잡고는 내 몸을 부축해 계단을 내려간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점점 강해지는 아이의 향에 취해 어찌 반항도 못하고 끌려 내려온 나는 부실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초주검 상태였다. 우미는 나를 부실 의자에 앉히더니 조금 화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몸이 안 좋으면 쉬시라고 했잖아요. 무리하지 말라구요. 연습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최우선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 우미. 그게……."
"변명하지 마세요! 아무튼 에리는 오늘 연습 금지에요. 여기서 꼼짝 말고 계세요."
"으, 응……."



호노카를 혼낼 때처럼 무섭게 몰아붙이는 우미의 말에 제대로 반박 한 번 못 해보고 꼬리를 내렸다. 확실히 몸이 안 좋기도 했고, 먹은 게 없어서 움직일 힘도 없었으니 오늘 하루는 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쉬고 나면 좀 괜찮아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런저런 일들로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옆에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가 받쳐졌다. 그와 동시에 계속 저를 괴롭혀 온 익숙한 피 냄새가 다시 레프트훅을 날리며 들어온다.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니 역시 우미였다. 제대로 쉬나 안 쉬나, 제가 감시하고 있을 거에요. 청천벽력같은 말이다. 우미야 악의 없이, 오히려 선의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이런 건 결국 나만 죽어나는 짓인데.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고 아이에게서 최대한 몸을 멀리 했다. 나, 나는 기대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되도 않는 변명이 먹혔는지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우미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나는 의자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직은 조금 덥네요……. 창문이라도 열까요?"



대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이 아닌지 아이는 몸을 살짝 뒤로 돌려 뒷편에 있던 창문을 열었다. 아, 어퍼컷. 어퍼컷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아이의 혈향, 움직이며 땀을 내는 바람에 더 짙어진 체향,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그리고 나는 닷새 째 굶주린 상태였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무언가 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마 제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리라.



"…우미, 미안해."
"네?"



배려 없는 사과가 아이에게 닿기도 전에 달려들어 새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아넣었다. 고통에 찬 새된 신음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아, 아파요, 에리! 밀어내려는 듯 내 어깨를 잡고 힘을 줘보지만 뱀파이어와 인간의 완력은 천지차이였다. 단내를 풍기던 아이의 피가 목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달다. 정말 달디 달다. 달착지근한 향 만큼이나 맛도 달았다. 인간들의 음식에 비유하자면, 초콜릿 같은 느낌이랄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이는 이제 반항하는 걸 포기했는지 가끔 고통에 몸을 움찔거리는 것 빼고는 망연히 앉아만 있었다. 주린 배가 어느 정도 불러오자 생각할 기운이 생겼는지 집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성을 되찾고 아이의 목에서 입을 뗐을 때는 이미 나흘치 배를 채우고 난 뒤였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목덜미와, 상처에 조금씩 맺히는 핏방울, 생살을 찢기는 고통에 흐른 아이의 눈물을 보고나서야 엄청난 짓을 해버렸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에리, 이게 무슨……. 울음섞인 목소리로 물어오는 아이에게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사람을 해쳤다는 생각에 갑자기 그런 짓을 당한 아이 만큼이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미안하단 한 마디를 겨우 뱉어내고 부실을 뛰쳐나와 버렸다. 비겁하게도.







아이를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했던 고민은 다음 날 학교에 오자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무슨 욕을 먹어도 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어제 일을 사과하러 2학년 교실에 찾아가자 우미는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허무한 답변만 돌아왔다. 우미 없이 둘만 돌아다니던 호노카와 코토리에게 우미의 결석에 대해 물었더니 하는 말이,



"아- 에리 쨩은 어제 일찍 가서 몰랐구나! 우미 쨩도 어제 연습하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일찍 집에 갔는데, 병원에 갔더니 빈혈이라고 그랬대. 뭐라더라, 체내 혈액량이라는 게 훅 줄어들었다나? 어쩐지 핏기가 없어 보이긴 했는데……. 근데 에리 쨩, 아직도 아픈 거야?"
"…아, 아니. 괜찮아. 하, 하하……."



일 났다. 빈혈이라니. 나 때문에 그런 게 뻔했다. 하긴, 사흘치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했으니 아이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확 굳어버린 얼굴을 보고 제 걱정을 하는 호노카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말하긴 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우미를 만나기까지의 텀이 길어질수록 나중에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는 더 어려워질 거였다. 오늘이라면 사과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문자나 전화로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고. 혼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 서 있던 코토리가 말을 걸어왔다.



"있지, 에리 쨩도 우리랑 같이 우미 쨩 병문안 갈래?"
"병문안?"
"응! 학교 끝나고!"



참, 나는 가게에 들러서 만쥬를 싸갈 테니까……. 병문안을 가는 건 처음이라며 혼자 신나서 재잘재잘 떠드는 호노카의 말에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우미와 만나면 어색할 게 분명했지만, 호노카나 코토리와 함께 있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아이의 피를 맛본 이상 둘만 남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기도 했고, 어제의 일에 대해 어떻게 해명을 해야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라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렸다.



"호노카, 코토리? 저, 에리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나가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어? 으, 응……."



그리고 호노카와 코토리를 이용해 무난히 얼굴만 보고 오자 했던 계획은 우미의 그 한 마디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다. 역시 화난 거겠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우미의 눈치를 살피며 방을 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보다가, 에리, 하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우미를 쳐다봤다. 으, 응? 목소리가 떨렸다. 저기,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몸을 살짝 일으켜 침대헤드에 기댄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방 안에는 우미의 가쁜 숨소리만 들린다. 몸이 많이 안좋은지 불규칙적으로 내쉬는 아이의 숨소리에 죄책감과 함께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앉아만 있다가, 드디어 아이가 말문을 열었다.



"에리, 제가 어제 잠깐 찾아봤는데……저, 에리는 혹시……그……."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하다 말고 얼굴을 화악 붉힌다. 열이라도 있는건가 싶어 이마에 손을 대보려 일어났다가 아이의 얼굴을 보고 흠칫 물러섰다. 가쁘게 숨을 내뱉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아이의 모습은, 아픈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뭐랄까, 색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였다.

그나저나 찾아봤다니, 뭘 찾아봤다는 거야. 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어제 그런 일이 있은 이상 이 똘똘한 아이는 제 정체를 알아내고도 남았을 거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차가운 손바닥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아이가 말을 꺼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아니면 숨기는 게 좋을까. 머릿속으로 끝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우미도 계속 머뭇거리며 제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다 눈을 꼭 감고 말을 내뱉는다. 동시에 내가 입을 열었다. 아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정체를 밝히는 게 좋을 거라는 게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에리. 혹시나 하는 말인데, 목에 페티쉬……라는 게 있으신지……."
"우미, 나는 사실……. …에?"



그러니까……페티쉬라는 게, 그, 특정 신체 부위에 흥분을 느낀다는……. 그, 그만! 말하지 마세요! 혹시 이 단어에 다른 뜻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눈에 띄게 얼굴을 붉히는 아이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 뜻이 맞는 것 같다. 저가 말해놓고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우미는 내가 어제 저의 목덜미를 좀 세게 물었기 때문에 피가 난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긴, 이런 건 평범한 게 아니니까 내가 뱀파이어일 거라는 건 생각도 못한 것 같고. 이럴 땐 아이의 눈치 없는 면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 덕에 상상도 못했던 단어를 내뱉어버린 아이는 깔깔거리며 웃는 나를 밉지 않게 흘기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그만 웃으세요……! 쥐어짜듯 힘겹게 말을 하는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겨우 웃음을 멈추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아, 간만에 크게 웃었네. 그보다 우미, 그런 건 어디서 알아온 거야?"
"…그, 인터넷에 검색해보니까 나와서……."



아는 사람이 갑자기 목을 무는 건 어째서인지 물어봤더니, 페티쉬가 아니냐고 하시길래……. 우물쭈물 말하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가 어제 일이 떠올라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저, 어제는 미안했어. 많이 아팠지…….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아이는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아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핏기 없는 얼굴로 힘겹게 미소짓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근데 진짜 왜 물었던 거에요? 그것도 피날 정도로……."
"아, 그게."
"혹시 정말로 그런 건 아니죠……?"
"그, 글쎄. 그거 비슷한 거라고 해야 하나……."
"비슷한 거요?!"



금방이라도 '파렴치해요!' 라고 외칠 듯한 아이의 놀란 얼굴을 보자 미안하던 마음은 싹 가시고 조금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원래 난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에는 우미를 보고 있으면 괜히 툭툭 건드려보고 싶은 게,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비슷한 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크게 움찔하는 반응에 속으로 웃으며 천천히 걸어가 아이가 기대어 있는 침대헤드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말이야, 우미. 허둥지둥 고개를 반대로 돌리는 아이의 얼굴을 살짝 잡아 나를 보게 했다. 붉게 물든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하다. 이런 반응에 더 놀리고 싶어지는 거라구.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며 아이의 턱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에, 에리?! 적잖이 당황했는지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버둥거리며 저항해 보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낑낑거리기만 한다. 오른쪽 목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니 내가 낸 상처가 만져졌다. 아직 다 아물지 않았는지 살짝 피가 배어나온다. 순간 죄책감과 함께 뭔지 모를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까 붉게 물든 얼굴을 한 우미를 봤을 때처럼, 가슴께가 간질간질한 듯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이는 손가락이 닿은 곳이 아픈지 눈쌀을 찌푸렸다. 그 찌푸려진 미간을 보자 어딘가의 스위치가 켜진 듯 입이 제멋대로 나불댔다.



"…그런 사람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건, 우미 잘못인 거지?"
"네? 무슨……."



말이 끝나자마자 튀어나간 몸은 우미의 목에 또 다시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머릿속으론 이러면 안되는데, 싶으면서도 혀로는 아이의 상처를 할짝거리고 있었다. 어제의 그 느낌을 떠올리자 묘한 쾌감마저 들었다. 자, 잠깐만요, 에리. 아파요……! 아이는 제 상처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자 쓰라렸는지 내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는 듯 싶었지만, 힘없는 손길은 본능에 충실한 뱀파이어 한 마리를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이의 목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음미하다가 스쳐 지나가는 위화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벙찐 얼굴로 잔뜩 찌푸린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 미안해. 그, 몸 챙기고……내일 보자! 횡설수설 말을 내뱉고는 황급히 아이의 방을 뛰쳐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호노카와 코토리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에리,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게 묻는 아이들에게서 집에 일이 생겼다는 변명으로 도망쳐 나왔다. 우미네 집이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멀리 뛰어와서야 숨을 돌렸다.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숨이 차서가 아니었다. 당황스러워서. 방금 깨달아버린 사실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착각이길 바라며 기억을 되짚었다. 유감스럽게도 착각이 아니다. 착각일 수가 없었다. 어제는 그렇게 달디 달던 아이의 피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건지. 혈액 특유의 비릿함 대신에, 물처럼 밍밍한 맛의…….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다. 불과 어제, 그냥 지나가듯 툭 던진 말이었다.



'사랑을 하면 나오는 호르몬이 속을 더부룩하게 한다나.'
'처음 마실 땐 그대로인데 두 번째부터 그 사람의 피 맛이 물처럼 밍밍하게 느껴진다고 했던 것 같다.'



이건, 설마—.






***



개연성 똥망 설정 클리셰 급하게 마무리지어서 찝찝한 결말...


죄송합니다. 분발하겠습니다.

[아리우미] 스톡홀름 증후군

[아리우미]



아리우미의 소재 멘트는 '이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키워드는 녹슨 반지이야.
위험한 느낌으로 연성해 연성
http://t.co/4iTlLUXdfP

+

스톡홀름 증후군 -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 현상을 가리키는 범죄심리학 용어.







"아리사, 얼마 전에 오픈한 디저트 카페 말인데……."
"미안, 유키호! 나, 오늘은 급히 가봐야 해서……. 미안!"
"어? 아, 으응……."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를 뒤로 하고 교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오늘따라 종례는 또 왜 그렇게 길게 하는지,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뛰어나가려 움찔거리는 몸을 진정시키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 힘들게 뛰어다녔더니 어느새 교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속눈썹 끄트머리에 매달린 땀방울이 눈앞을 가린다. 소매로 대충 닦아내고 깜빡이는 초록불이 꺼지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려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지만 결국 제 바로 앞에서 빨간불로 바뀌어버렸다. 여차하면 그냥 건너가려고 했는데, 기세 좋게 달리는 차들 때문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리사는 휴대폰을 꺼내 저를 이렇게 뛰게 만든 문자 메시지를 열었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집에 왔어. 언제쯤 와?」



나 지금 가는 중이야. 그 짧은 문장을 쓰는 데에도 손이 덜덜 떨려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겨우 문자를 보내고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창이 뜨자 타이밍 좋게 초록불이 켜졌다. 아리사는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제 다리를 몇 번 주무르고 다시 달렸다. 이미 힘이 다 빠져 뛰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달렸다. 다리를 바삐 움직이는 것만으로 집에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 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 시간 전에 온 문자였다. 이미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그 이후로 다른 문자가 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을 찾은 후라면? 제가 도망칠까봐 일부러 문자를 보내지 않은 거라면? 머릿속에서 최악의 상황이 재생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 언니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고 있을—. 거기까지 생각하고 아리사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보다 일어났을 확률이 더 높다는 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제 그런 말만 안 했어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는 당신의 울음섞인 외침에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해버린 건 바보같은 짓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두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당신의 그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말은 끝까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의 사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며 힘들게 말을 토해내던 당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그대로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몇 시간이나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이제야 조금씩 받아먹기 시작하던 음식에도 손도 대지 않았다. 결국은 당신을 위해 사온 저녁을 다 버리고 말았다. 내가 잘못한 걸까. 하지만 난 아직도 뭐가 틀린 방식이라는 건지 모르겠어. 난 그냥,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쁘게 발을 움직이자 어느새 오피스텔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올라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숨이 차서인지, 눈앞에 펼쳐져 있을 상황에 대한 긴장감 때문인지. 문 밖으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에 조심스럽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언니?"



집 안은 예상과 달리 너무도 조용했다.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들려야 할 소음마저 없는 공간은 그것대로 또 다른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몸이 불편해서 온 거면 방에 있어야 할 텐데, 설마 그녀를 데리고 나간 걸까. 그래, 평소보다 일찍 들리는 문소리에 그녀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겠지. 낯익은 목소리에 자신의 언니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헤맸을 거고, 그 소리가 내 방에서 들린다는 걸 안 후에는—그러고보니 오늘 아침에는 서둘러 나오느라 방을 잠그는 것도 잊어버렸다. 하필이면……. 아리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언니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건 식탁 위에 붙여져 있는 작은 포스트잇이었다.



『몸이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우미 찾으러 나갔다 올게. 혹시 아이들에게 연락이 오면 내가 나갔다는 건 비밀로 해줘.』



땀이 축축히 배어나오는 손을 교복에 쓱 닦고 쪽지를 읽어나가던 아리사는 무언가 어색한 대목에서 잠시 눈을 멈췄다. '찾으러', 라는 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아리사는 종이쪼가리를 집어 던지고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 구석에 있는 작은 창고 문을 열었다.



"…아."
"……."
"…다, 다녀 왔어요."



하늘이 도우신 걸까, 그곳에는 조금 지쳐보이는 당신이 벽에 등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먹으라고 두고 나간 아침 식사는 그대로 있었지만, 언니에게 들키지 않고 멀쩡히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아져 기대어 있는 당신의 몸을 꼭 안았다. 힘 없이 벌려져 있던 팔이 제 품에서 축 늘어진다. 확실히 우미는 처음 데려왔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졌다. 밥을 안 먹으니까 이렇죠. 속상한 마음에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길래 옆에 있던 물컵에 물을 받아 목을 축이게 했다. 바싹 말라 있던 목에 액체가 들어가자 사레가 들렸는지 몇 번 콜록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에리가, 왔다 갔어요."
"…언니요?"
"……."



우미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아리사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왜 구해달라고 하지 않았냐구요. 밖에……나가고 싶지 않아요? 가둬놓은 게 누군데, 상대방의 입장에서 들으면 참으로 어이가 없을 말이었다. 우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피식 웃고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 예쁘던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는 게 안쓰럽다.



"…저를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냥 무시해버릴 정도로……정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러면서 입술을 비틀어 살짝 웃는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제 처지에 누구를 생각하고 있냐는 듯한. 아리사는 멍하니 우미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목이 아픈지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침을 참아내며 그녀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도망……안 갈테니까요."
"……."
"이것도 이젠, 팔찌처럼 편하네요."



저가 말하고도 웃기는지 피식 웃으며 제 팔을 들어보인다. 가죽으로 마감된 족쇄가 눈앞에서 흔들린다. 그래, 정말로, 그녀를 구속하고 있는 삭막한 쇳덩이는 녹슬어 색이 바란 팔찌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도 소노다 우미의 효과인 걸까. 아리사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아직도 제 품에 안겨 있는 우미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푸석해진 피부와 홀쭉해진 뺨이 안타깝다. …식사도 챙길게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재빨리 덧붙여 말한다. 그러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아리사는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


개연성을 위해 진단메이커의 '녹슨 반지' → '녹슨 팔찌'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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